루마니아 정홍기 선교사 – 복음의 값진 열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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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방우체국-루마니아 정홍기 선교사] 복음의 값진 열매들2013.07.21 17:13

길거리서 운명적으로 만난 크리스틴과 비르질 주님 영접하고 ‘20년 동행’

어두침침한 건물, 낡은 다락방에서 풍기는 듯한 퀴퀴한 냄새, 부서진 공중전화 박스와 창밖으로 담배연기를 내뿜는 택시기사…. 1993년 6월 도착한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로부터 받은 첫인상은 ‘낡고 오래된 도시’라는 느낌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첫인상도 그저 그랬습니다. 일상에 찌든 듯한 모습과 한가로운 표정, 한편으로 너털웃음의 정(情)도 간직한 마음도 엿보이는 그런 도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곳에 부르신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런 믿음 가운데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첫 번째 선물은 크리스틴(40·은행원)이었습니다. 그를 처음 만난 건 아내(이명자 선교사)였습니다.

수도인 부쿠레슈티에서 사역을 준비하던 때였습니다. 아내는 시장에 나가 식재료를 사면서 언어도 배우고 사람도 사귀었습니다. 어느 날 겨울철 음식을 만들어놓기 위해 호박을 사서 집에 오는 길에 아내는 노점에서 책 몇 권을 펴놓고 파는 소년을 보았습니다.

아내는 루마니아어 사전을 구입하면서 말을 건넸습니다. “당신을 우리 집 저녁식사에 초대하고 싶어요.” 그는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저녁식사 자리에서 아내는 한국을 소개하면서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그가 문 밖을 나설 때였습니다.

“내 영혼을 당신이 책임질 수 있나요?”

순간 놀랐지만 이 선교사는 마음을 가다듬고 답변했습니다.

“나는 당신의 영혼을 책임질 수 없어요. 하지만 당신의 영혼을 책임져 주실 분을 소개해 줄게요.”

그때가 꼭 20년 전 가을 무렵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크리스틴은 성경공부와 예배에 신실하게 임하고 있습니다. 결혼도 우리교회(시온장로교회)에서 올렸습니다. 신부의 드레스와 화장, 부케는 아내가 준비했고, 주례는 내가 맡았습니다. 크리스틴 부부는 현재 여덟 살 난 딸과 함께 교회에서 교사로, 찬양인도자로 섬기고 있습니다.

아내가 사역 초창기 크리스틴과 신앙적 교제를 나눌 무렵 나는 당시 20대 중반의 비르질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점심식사를 하지 못해 시장에서 바나나라도 사먹으려고 가게 주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해 내가 당황하고 있을 때 나타난 청년이 바로 비르질이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나 역시 그를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당시 그는 구두공장 노동자인 아내와 집시거주 구역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여섯 살배기 아들은 시골 할머니 집에 맡겨 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는 수시로 아내와 함께 우리 집에 들러 샤워를 하곤 했습니다. 집시거주 구역에는 워낙 시설이 열악해 몸 씻을 공간이 없었던 것입니다.

비르질은 자연스럽게 크리스틴과 함께 성경공부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비르질의 신앙적 진보는 다른 이들에 비해 더딥니다. 하지만 그는 요즘 열다섯 살짜리 소년을 전도해 성경공부를 함께할 정도로 믿음의 뿌리가 깊어지고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우리 사역의 첫 열매인 크리스틴과 비르질의 이야기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우연히 만나 지금까지 교제를 이어오고 있는 것 같지만 당시 이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커다란 도전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에 루마니아인들은 ‘낯선 사람과 접촉 금지’ ‘낯선 자의 집 방문 금지’ 등의 준수사항이 있었습니다. 외국인을 간첩으로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20년 동안 이들처럼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열고 복음을 수용하는 이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동방정교회 신자가 대부분인 이곳에서는 기독교인이라 해도 대부분 ‘성탄절’ ‘부활절’에만 교회에 나오거나, 결혼식이나 장례식 때에만 얼굴을 비추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 때문에 초창기 사역도 도전과 인내의 연속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통로는 주로 식사 대접이었습니다. 초대에 응한 자들이 있으면 시간 약속을 하고 정성껏 음식을 준비해서 기다립니다. 하지만 밤이 깊도록 나타나지 않는 일도 다반사였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곳 문화에서는 상대방 앞에서 ‘노(NO)’라고 말하는 건 예의가 아닙니다. 당장 내일 자신이 약속을 지킬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면전에서 ‘예스(Yes)’라고 약속하는 것은 으레 있는 일입니다. 저희로서는 철석같이 믿었다가 속고 또 속았지만 ‘믿어주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런 경험은 우리에게 커다란 영적 유익이 되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해인가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다니엘이라는 청년이 성경공부에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시장에서 짐을 나르는 짐꾼이었는데, 잠 잘 곳이 없어 늘 시장 골목 한 모퉁이에 기거했습니다. 우리는 그에게 급한 대로 옷을 챙겨주었고, 혁대와 구두도 사줬습니다. 교회에서 잠을 잘 수 있도록 배려도 해줬습니다.

한 달쯤 지났을까. 다니엘은 월급을 탔다면서 1㎏들이 쌀을 사서 우리에게 전해주는 게 아니겠습니까. 지금은 우리 곁을 떠났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사역의 열매 가운데 시온장로교회의 첫 파송선교사인 올리비아나(여·28)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주일학교 사역의 값진 열매이기도 합니다. 교회를 건축하고 본격적으로 주일학교 사역을 시작했는데, 주민들, 특히 아이 부모들의 방해와 핍박이 심했습니다.

“교회는 주사기로 피를 빼어 팔고, 간을 빼어 약에 사용하는 무서운 곳이다….” 이런 터무니없는 유언비어를 극복한 힘은 인내와 사랑, 순종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린이들을 위한 성경공부 교재는 물론 찬양집과 성가곡집을 만들어가며 어린이 신앙 양육에 힘을 쏟았습니다.

올리비아나가 교회에 첫발을 디딘 건 1999년 크리스마스 이브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알코올 중독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던 상태였고, 어머니의 마음은 아버지를 이미 떠나 있었습니다. 가정 해체의 위기를 겪고 있는, 철저한 무신론자 집안의 올리비아나는 복음을 접한 지 4년 만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입니다”라고 고백하며 그리스도인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가정에서 보듬어주지 못한 사랑과 격려와 용기, 무엇보다 삶의 의미를 교회 주일학교를 통해 찾은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알코올 중독자 신세로 있고, 어머니는 지금도 아버지와 이혼할 기회를 찾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나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고, 매일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능력을 받는다”고 고백하는 믿음의 용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힘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초대교회 제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증거하는 일에 열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흩어져서 복음을 전할 때 많은 기적이 일어났으며, 그로 인해 믿는 자의 수가 더해지면서 제자들은 힘을 얻었습니다. 그 당시 제자들과 함께한 성령이 오늘 날에도 변함없이 우리와 동행하고 있음을 순간순간 체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어와 문화, 음식 등이 모두 낯선 이곳에 온 우리가 낙심하지 않도록 때를 따라 도움의 손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때마다 다시 한 번 이 말씀을 가슴에 품고 우리의 할 일을 되새깁니다.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행 5:42)

루마니아 정홍기 선교사

●정홍기 선교사

-1954년 전북 고창 출생

-1985년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대 졸업

-AFC선교회 간사(1986∼1991)

-1992년 AFC선교회 루마니아 선교사로 파송

-루마니아 시온장로교회 목사(1992년∼현재)

-루마니아 전문인 지도자 개발원 대표(2010∼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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