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사랑한 선교사 7 George Heber Jones 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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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신교 초기 역사를 담은 ‘최초의 통사(通史)’

▲1897년 저자 존스가 사역하던 제물포에서 찍은 가족 사진(206쪽). ⓒ홍성사 제공

한국교회 형성사

G. H. 존스(옥성득 편역) | 홍성사 | 440쪽 | 16,000원

최초의 선교사가 건너온 1884년부터 일제 시대로 들어가는 1916년까지, 한 세대 30여년 한국 개신교 초기 역사를 담은 ‘최초의 통사(通史)’ 「한국교회 형성사」가 홍성사에서 발간됐다. 책에서는 초기 선교의 생생한 현장과 함께, 1세대 선교사의 견해를 만나볼 수 있다.

이 책은 조원시(趙元時)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1888년부터 1909년까지 ‘대한제국’에서 활동한 북감리회 선교사 조지 히버 존스(George Heber Jones)가 1917년 집필했으며, 1919년 그의 사망으로 출간되지 못한 채 뉴욕 컬럼비아대 유니언신학교 한 도서관 고문서실에서 잠자던 원고를 옥성득 교수(UCLA)가 발굴, 꼼꼼한 주석과 번역을 통해 세상에 나오게 됐다.

이는 이제까지 개신교 첫 통사로 알려진 백낙준(白樂濬)의 1927년 논문 「한국개신교사, 1832-1910(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1832-1910)」보다 10여년 앞선 작품이다. 옥 교수는 이에 대해 “비록 출판되지는 않았지만, 1917년에 완성된 존스 박사의 원고는 백낙준 박사의 논문보다 10년 앞서 작성되었으므로, 최초의 한국 개신교 통사로 인정받아 마땅하다”며 “특히 존스는 책의 제목을 ‘The Rise of the Church in Korea’라고 하여 떠오르는 교회가 한국의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주려고 했는데, 이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the Land of the Morning Calm)’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새롭게 변화시키려는 시도였다”고 밝혔다.

옥성득 교수는 “존스는 ‘선교사관’의 입장에서 개신교의 한국 ‘전래사’를 ‘교회사’ 관점으로 보고 신학적 언어로 서술했고, 그의 선교사관은 ‘토착 교회의 형성’에 초점을 두고 있다”며 “박사논문이어서 논리실증적 논문체였던 백낙준의 글과 달리, 존스의 글은 신학교 강의를 바탕으로 해 미국의 평신도들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큰 그림을 보여주면서 문학적인 이야기체로 쓰였다”고 설명했다.

▲구한말 한 기독교인 가정이 성경을 읽고 있는 모습(109쪽). ⓒ홍성사 제공

존스는 이 책에서 한국 선교 초기 역사에 대한 개략적인 서술과 함께 한국인과 한국의 지리, 선교사들의 활동과 역경, 토착 교회의 형성 등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글을 읽다 보면, 선교를 위해 한국 이곳저곳을 다니고 전혀 모르던 언어인 한글을 연구하던 그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하다.

특히 유·불교와 무교(巫敎) 등에 대해 소개하는 ‘한국의 종교생활’과 함께, 하나님(신) 사상과 인간의 도덕적 책임, 예배와 기도, 영혼불멸 사상 등 ‘토착 종교’와 기독교의 접촉점이 될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해 분석하고 있는 부분이 눈길을 끈다. 무신론자가 아니라 다신(多神)의 세계 위에 한 최고신이 통치한다고 믿는 한국인의 ‘하나님 개념’은 실제적으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포스트모던 사상과 과학 만능주의, ‘무신론이라는 신’을 믿는 현대인들을 전도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탄식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21세기 한국교회로서는, 오히려 당시의 ‘영적 토양’을 부러워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옥 교수가 서문과 역주에서 밝힌 것처럼 존스는 미국적 관점에서 당시 일본의 한반도 진출에 긍정적인데, 이는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 존스의 이러한 관점을 반면교사로 삼는다면, 해외 선교지를 바라보는 선교사 또는 그리스도인 후원자들의 시각에 대해 좀 더 진중하게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말 번역문 뒤에 존스가 쓴 영문 원문도 그대로 수록해, 책에 쓰인 많은 한국 토착 용어들을 그가 어떻게 영어로 표기했는지 등을 엿볼 수 있다.

“19세기 후반 4반세기에 와서야 복음주의 기독교 선교는 한국을 발견했다. 따라서 그것은 교회가 아시아에 진출한 마지막 사건의 하나였다.”, “아시아에서 한국의 대도시 서울보다 더 괄목할 만한 역사를 지녔거나, 기독교 세력이 쏟은 생명과 노력에 더 많은 이익을 돌려 준 도시는 없다 해도 지나친 주장이 아니다. 선교사들이 사역을 시작한지 겨우 30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 짧은 30년간 한국 기독교는 100년의 성취를 낳았다.”

존스가 쓴 이 책의 첫 두 문장과 마지막 두 문장이다. 은자의 나라,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뒤늦게 찾아온 벽안의 외국인들은 책에서도 등장하듯 풍토병과 갖가지 사고로 수많은 피를 흘리는 희생을 치러야 했다. 하지만 이 짧은 30년간의 ‘마지막 사건’은 선교사가 스스로 밝히듯 이후 100년간 수많은 열매를 거둔 가장 위대한 사건의 하나였다.

저자 G. H. 존스는

존스(조원시) 선교사는 1867년 8월 뉴욕주에서 태어나 1881년 부흥회에서 회심했으며, 1887년 파송돼 1888년 5월 감리교 남성으로는 네번째로 한국에 왔다. 1891년까지 배재학당 교사와 교장으로 봉직한 후 1892년 제물포 선교관리 책임자로 부임해 내리교회 2대 담임목사가 됐고, 인천 영화학교를 세웠다. 이후 인천·강화·부평·부천·황해 연안·남양 등지의 선교에 힘쓰며 1903년까지 44개의 교회를 개척했고, 3천여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1894년 내리교회에 한국 최초의 여성 전용 예배당을 세웠고, 1901년에는 인천 최초의 서구식 제물포웨슬리 예배당을 신축했다.

▲최초의 신학 교육을 실시한 존스와 신학반 신학생들 모습(199쪽). ⓒ홍성사 제공

1893년 제물포에서 한국 최초의 신학 교육이라 할 수 있는 신학반을 열었고, 최초의 한글 찬송가인 <찬미가(1892)>와 한국 최초의 잡지 ‘Korean Repository’, 한국어 최초 신학잡지 <신학월보(1900-1909)>를 발간하는 등 출판 분야에도 공헌했다. 1902년 하와이로 떠난 최초의 한인 이민자들을 주선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1909년 부모 봉양과 자녀 교육을 위해 영구 귀국했지만, 이후 뉴욕 북감리회 선교부 총무로 임명돼 한국 선교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하면서 한국의 교회와 종교, 역사와 문화에 대해 저술했다. 1911년 한국 선교 25주년 운동 실행총무로 섬겼고, 보스턴대 신학대학원에서 선교학 강의를 하던 중 이 책을 집필했다. 그는 1919년 5월 플로리다 마이애미에서 52세로 병사했다.

http://www.christiantoday.co.kr/articles/269316/20140105/%EC%9D%B4-%EC%A7%A7%EC%9D%80-30%EB%85%84%EA%B0%84-%ED%95%9C%EA%B5%AD-%EA%B8%B0%EB%8F%85%EA%B5%90%EB%8A%94-100%EB%85%84%EC%9D%98-%EC%84%B1%EC%B7%A8%EB%A5%BC-%EB%82%B3%EC%95%98%EB%8B%A4.htm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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