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사랑한 선교사 13 조세핀 켐벨 (1853년 4월 1일 ~ 1920년 1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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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 캠벨 (Josephine Eaton Peel Campbell 강모인 姜募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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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감리회 최초의 여선교사로 내한한 캠벨 부인. 북감리회에 스크랜턴 부인이 이화학당을 세우고 전도부인과 여권서 8명과 함께 전도해 상동교회와 동대문교회를 세웠다면, 캠벨 부인은 배화학당을 세우고 전도부인 7명, 자원봉사 전도부인 6명과 함께 자교교회와 종교교회를 설립했습니다. 스크랜턴 부인은 23년간 일하고 68세에 소천했고, 캠벨 부인은 24년간 활동하고 66세에 소천. 현재 양화진 서울외국인묘지공원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캠벨은 1853년 4월 1일 미국 텍사스에서 출생하여, 21세 되던 1874년 조셉 캠벨(Joseph Campbell)목사와 결혼하여 1남 1녀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런데, 27세 되던 해에 남편과 사별한 캠벨은 곧 두 자녀도 병으로 잃었습니다. 이러한 시련을 겪으면서 그녀는 일생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시카고의 간호학교를 졸업합니다.
졸업 후 33세 되던 해 중국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상해와 소주에서 10년 동안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캠벨 선교사는 1897년 44세 때 한국에 들어와서 ‘배화학당’을 세우고 여성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캠벨은 1897년 10월에 남감리회의 첫 번째 여성선교사로서 중국인 양녀와 함께 한국에 들어옵니다. 함께 온 중국인 양녀(養女) 여도라(Dora Yui, 余小姐)는 한국에서 간호사로, 교사로, 전도자 등으로 활동하면서 캠벨의 선교사업을 훌륭하게 조력했습니다.

한국에 도착한 캠벨 선교사는 윤치호의 마중을 받았으며 남대문 근처의 남송현(南松峴) 선교부에 정착했습니다. 이 지역은 리드(李德) 선교사 부부가 이미 훌륭하게 선교사업을 진행하고 있었으며, 감리회의 상동병원과 북장로회의 제중원이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지역을 개척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1898년 8월 1일 ‘고가나무골’(漢城府 仁達坊 古磵洞, 지금의 내자동으로 주로 내시들이 살던 곳) 이항복의 집터로 선교지를 옮겨 본격적으로 여성 기숙학교(Boarding School)를 육성했습니다. 이것이 1898년 10월 2일 남감리회의 대표적 여학교 ‘배화학당’ 창설입니다. 처음 이름은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어린이 헌금이 일부 쓰여졌기 때문에 “캐롤라이나 학당(Carolina Institute)”이라 했습니다.

이때 교사(敎師)는 2명이었고, 과목(科目)은 한글과 한문이었습니다. 학생은 6명으로 첫 학생은 선교사 사택 수위였던 박씨의 딸이었습니다. 다른 학생은 캠벨이 순회 전도하며 데려온 아이들이었습니다. 초기 수업 때 캠벨은 영어로 밖에 말할 수 없어 손짓, 발짓, 무언극으로 표현했습니다. 이 같은 교육은 춤을 추듯 한다하여 “발레 수업”이라 했습니다. 그 후 1903년 12월 ‘배화학당’이 되었으며 교육과정은 산술, 독본, 생리학, 지리, 역사 등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배화(培花)란 “꽃을 기른다”는 뜻이며, 배화학당(培花學堂)이란 “여성을 아름답게 기르고, 꽃 피워 내는 배움의 터전”을 의미했습니다. 그 후 배화학당은 1909년 배화여학교로 인가를 얻어 졸업생을 정기적으로 배출했습니다. 캠벨 선교사는 1898년부터 1912년까지 초대 교장으로 봉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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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화학당의 기도실에서는 정기적인 예배가 드려졌습니다. 캠벨은 미국인 루이스 워커의 기부금으로 예배당을 신축하였는데, 정기예배는 이곳에서 지속되었습니다. 정기예배는 시간이 흐르면서 한 모임은 종침교 근처에서 종교교회로, 또 다른 모임은 자하교 근처에서 자교교회로 발전하였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정춘추 전도사와 홍다비다 전도부인 중심의 신앙 공동체가 이전(移轉)하여 종교(宗橋)교회가 되었고, 윤상은 전도인 중심의 루이스 워커 기념예배당 잔류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자교(紫橋)교회로 발전했다고 합니다. 캠벨 선교사는 여성 교육 사업과 병행하여 전도부인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인식하고 전도부인 양성사업에도 주력했습니다.

한국여성들을 복음 안에서 새롭게 변화시키는 일에 헌신하던 캠벨은 1918년 65세 때 안식년을 얻어 미국으로 돌아가다가 그만 신병을 얻게 됩니다. 안식년이 끝난 후, 그녀는 신병과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장시간의 뱃길을 통해서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캠벨 부인은 “나는 조선에 몸을 바쳤으니 죽어도 조선에 가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며 굳이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그녀는 자교교회 건축 자금을 모금한 상태였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칠순에 들어선 나이는 병을 이기기 어려웠습니다.1920년 11월 12일 67세의 나이로  “나는 내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서 마음이 기쁘다”며 하나님 품에 안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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