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사랑한 선교사 15 호가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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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구원이라는 사역에서 승리하기 위해 나를 도왔던 것은 교육을 통해서 얻은 것이 아니다. 나는 전혀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고, 오늘의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하신 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다”

이는 1908년 첫 구세군 선교사로 한국에 파송된 영국인 허가두(본명 Robert Hoggard) 사령관이 영국 <구세공보(the War Cry)>에서 한 말이다.

한국의 이동수단인 말을 타고 있는 허가두 사령관과 그의 부인(사진 중간과 오른쪽)©뉴스미션

한국의 영혼들을 사랑했던 선교사

한국구세군 100년사 편찬위원회(위원장 김준철 사관)는 구세군 한국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을 맞아 허가두 사령관에 대한 사료들을 집대성, 해설과 부록을 동반한 단행본 <허가두 생애와 사역>을 출판했다.

이 책에는 그동안 우리 속에서 잊혀져 가는 해외 선교사들 중에 특히 한국구세군의 첫 선교사 허가두 사령관과 그의 부인의 선교자료가 정리돼 있다.

이 책의 출판을 기획한 김준철 사관이 2006년 2월 허가두 사령관의 전기를 쓰려고 했을 때 관련 자료 부족으로 집필의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그는 “한국 최초의 구세군 선교사의 전기를 그려나가는 작업은 책상머리에 앉아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며 “결국 그가 태어난 곳과 하나님께 회개한 장소 등 허가두가 밟은 발자취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서야 비로소 책을 집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에 김 사관은 영국의 ‘구세군국제역사 자료실’에서 허가두의 자료 일체를 수집하는 것으로부터, 그의 태어난 곳, 성장배경, 선교사로 다짐해 한국행을 선택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추적해 입체적으로 구세군 최초 한국 선교사의 일대기를 남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허가두의 일생을 되짚어 보는 것은 한국의 영혼들을 사랑했던 선교의 열정과 하나님 사업을 확장시켜 나갔던 개척선교 사역의 비전과 영적 부흥을 체험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 구세군 개척자 허가두 사령관과 그의 부인©뉴스미션

개척자의 사명 수행하는 데 충성한 허가두 사령관

허가두는 구세군 창립자 윌리엄 부스 대장으로부터 파송을 받아 100년 전인 1908년 8월 18일 증기선 ‘자이텐 호’를 타고 한국을 향해 출발해, 이탈리아와 일본을 거쳐 1908년 10월 1일 한국에 도착했다.

당시 한국의 사회ㆍ역사는 한마디로 고난과 격동의 시기였다. 이 고난과 격동의 원인은 국내적으로는 정치ㆍ경제ㆍ사회 질서의 파괴와 부패에서 왔고, 국외적인 원인으로는 서구 및 한반도 주변의 강대국들의 지배싸움의 대상이 된 민족의 운명에서 비롯됐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나라를 잃은 민중들에게 제복과 군사적 용어를 사용하는 구세군은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급속한 발전을 했다.

이후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 1908년 10월 1일부터 1916년 6월 29일까지 8년의 허가두 사령관 재임기간 동안 사관 87명, 교인 2,753명, 영문(교회) 78개소 개척 등 놀라운 발전을 보였다.

길거리ㆍ시장ㆍ천막 어디서든 예배 드려

<허가두 생애와 사역>에 따르면 허가두 사령관은 진취적인 구령운동(Salvation War)을 펼치기 위해서는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고 결심했다. 그는 사도들, 특히 바울사도가 각지에 다니며 전도했던 모습을 본받아 사도행전적 여행 즉 조랑말을 타고 다니면서 시골 전도여행을 실시했다.

때로는 말에서 떨어졌고, 비를 맞으며 강을 건너고 자전거에 다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선교사들이 이루고자 했던 노력은 하나님으로 인해 성결케 하는 것이며 영광스러운 열매를 맺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가 예배를 드린 장소는 처음부터 교회건물 만이 아니었다. 길거리와 시장, 천막 어디서든 사람만 모이면 예배를 드렸다.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린 인원이 300명에 이르기도 했다. 특히 장날을 찾아 시장에서 집회를 열고 수 백 명의 영혼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 했다.

그가 “우리 사업처의 일부는 철도에서 10마일(16킬로미터) 떨어졌고 60마일(97킬로미터) 안으로는 서양 사람이 없는 외딴 곳에서 개척하고 있다”고 구세군 국제본영 <전세계(All the World)> 1910년 2월자 신문에 보고한 것은 그의 이러한 설교활동을 잘 보여준다.

허가두 사령관의 부인은 한국인 여성들과 소녀들을 위한 ‘여성 성경교실’을 개설했는데 회원수가 1천5백 명이 넘었다.

허가두 사령관은 “하나님은 영적 사업을 위해 구세군 안에서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를 사용하고 계신다”며 “특히 하나님은 한국 여성들의 깊은 영적 인격을 위해 그들 가운데서 활동하고 있는 허가두 정령 부인을 돕고 계신다”고 구세군 국제본영 <전세계(All the World)> 1911년 8월자 신문에 고백했다.

한국개척선교 현장의 악조건 속에서 개척자의 사명 수행

허가두 사령관은 한국 재임기간 내에 △구세군 찬송가 출간 △섬에 영문(교회) 개척 시작 △여성 하사관 훈련학교 개최 △주간 성경반 운영 △소녀들을 위한 학교 설립 △구세신문 발행 △구세군 악대 조직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한국 첫 구세군 선교사 허가두 사령관의 사료들을 집대성, 해설과 부록을 동반한 단행본 <허가두 생애와 사역>©뉴스미션

그의 이러한 열정적인 선교사역 활동은 그가 한국 선교지를 떠나게 될 때까지 문화ㆍ풍습ㆍ언어가 다른 초기 한국개척선교 현장의 악조건 속에서 개척자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 얼마나 충성하고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한편 구세군 하면 연상되는 ‘자선냄비’는 또한 1928년 사회적으로 혼란하고 어려운 시기에 시작된 운동으로 전 국민적인 관심과 호응으로 오늘에 이르게 됐다.

또한 구세군은 1909년부터 문서선교로 <구세공보>가 발행되었으며, ‘절제호’라는 특집호를 발행해 금주ㆍ금연의 절제운동을 시작했다. 이로써 무르익은 절제운동이 1921년부터 본격적으로 가두캠페인과 문서선교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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