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사랑한 선교사 17 윌리암 제임스 홀선교사 (William James Hall 1860-1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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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홀(Hall)일가의 선교와 사랑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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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제임스 홀 – 평양에서 의료봉사를 하면서 교회를 개척하다

1892년 평양의 의료선교를 가장 먼저 시작한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 1860-1895)은 1887년 무디의 설교에 감명을 받아 가난하고 불행한 아시아인들을 위해 일하려는 소명으로 뉴욕의 벨러뷰 의과대학에 진학하여 졸업한 후 빈민의료선교활동을 하다가 1891년 12월 캐나다 출신 미국 북감리회 의료선교사로 내한하였다.

홀 선교사는 1892년 3월부터 북부지방을 돌며 성경을 팔고 병든 자를 치료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미국 감리회 선교연회에서 평양 개척선교사로 임명되어 9월에 평양에 도착하여 여관에 머물면서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기독교에 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1893년 평양 서문동에 대지와 가옥을 구입하고 진료소를 설치했는데, 진료소의 설립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평양감사 민병석은 선교사퇴거명령을 내리는 등, 기독교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드러내었다. 또한 평양 주민들의 반발도 심했다. 그러나 홀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순교신앙으로 진료소 설립을 강행하였고, 주민들의 마음의 문도 점차 열리게 되었다.

1892년 6월 한국에서 로제타와 결혼한 제임스 홀 선교사는 1894년 한 살 된 아들과 함께 평양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청일전쟁이 발발하여 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서울로 잠시 내려와 있다가 전투가 끝나자 다른 선교사와 함께 혼자 평양에 올라가 전투 중 부상당한 군인들, 한국인들을 치료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아 과로가 누적되어 말라리아에 걸리게 되었고, 결국 서울로 돌아오던 중에 발진티푸스까지 걸리면서 제임스 홀 선교사는 1895년 11월 24일, 한국에 온지 3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때 아내 로제타는 임신 7개월 중이었다. 조선인들은 낯선 구경거리에 불과했던 외국인 선교사가 조선인 들을 위하여 목숨까지 희생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동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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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제타 홀 – 남편과 딸을 잃어도 일평생 계속된 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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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기홀병원 모습

제임스 홀의 별세로 28살에 미망인이 된 로제타(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와 아들 셔우드 홀은 1895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남편의 숭고한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고자 미국에서 모금운동을 펼쳤고 점자를 익힌 후 1897년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그 모금액으로 병원 설립을 추진하였다. 마침내 1897년 2월 평양에서 최초의 근대식 병원으로서 홀 의사를 기념하는 <기홀(紀忽)병원>이 설립되었다.

이때 사랑하는 딸(에디스)을 또 이질로 잃는 등의 고통 속에서도 로제타는 병원 일에 헌신하였다. 또한 맹인 농아학교 설립, 점자도입과 한글용 점자개발, 어린이 병동설립, 서울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설립(현 고려대 의대), 동대문병원(현 이화여대부속병원), 인천기독교병원, 인천간호보건대학 등을 설립, 또는 시작했다. 그리고 김점동(박에스더)이라는 한 여성을 미국으로 데리고 가서 의학 교육을 시켜, 1900년 박에스더는 한국 최초의 의학박사가 되었다. 이렇게 43년이나 지속된 그녀의 헌신으로 기홀병원은 수많은 한국인의 영육을 구원하는 북부지역 선교의 중심기지가 되었다.

셔우드 홀 – 폐결핵 퇴치를 위해 힘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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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아들 셔우드 홀(Sherwood Hall) 역시 토론토 의대를 졸업하고 부모님을 이어 조선에 와서 16년 동안 의료선교를 하였다. 그는 특히 폐결핵을 치료하는 전문가가 되었는데 그것은 이모처럼 따르던 박에스더가 폐결핵으로 희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해주에 최초의 결핵전문병원인 구세요양원을 세웠다. 당시 폐결핵 환자는 사회에서 완전히 격리된 채 비참한 생활을 감수해야만 했는데 셔우드가 이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뻗은 것입니다. 1932년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하여 결핵환자들의 치료를 돕고 결핵퇴치운동에 앞장섰다. 1940년 크리스마스 씰로 독립자금을 모았다는 등 일제가 꾸민 간첩혐의로 강제 추방되어, 이후 인도에서 또다시 의료봉사를 펼쳤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지니

이처럼, 평양의 개척 선교사 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는 불과 2년 11개월의 선교활동을 하고 3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그의 못다 한 사역은 아내와 아들을 통해 이어졌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는 말씀처럼 죽음 이후 헤아릴 수 없는 큰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제임스 홀을 비롯한 부인 로제타 홀, 아들 셔우드 홀, 그의 부인 메리안 홀, 셔우드 홀의 아들 프랭크 홀 등, 홀 가족은 3대에 걸쳐 6명이나 양화진에 안장되어 있다.

미감리교 조일 연회감독이었던 헬버트 웰치는 1983년 셔우드 홀이 저술한 『조선 회상』이라는 책의 서문에서 “여기 한권의 책이 있다 그리고 여기 한 인간이 있다 그 책보다 더 위대한……”이라고 썼다. 홀 가(家)의 한국을 향한 사랑과 희생, 헌신의 삶은 우리에게 숭고함이 무엇인지 일깨워 주며 절로 고개를 숙이게 한다.

양화진에 묻힌 홀(Hall) 일가

1.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 중 최초로 순직한 닥터 윌리엄 제임스 홀(Dr. Willam James Hall)

2. 그의 아내인 닥터 로제타 셔우드 홀(Dr. Roetta Sherwood Hall)

3. 아들인 닥터 셔우드 홀(Dr. Sher wood Hall)

4. 며느리 닥터 메리안 홀(Dr. Marian Hall)

5. 셔우드 홀의 여동생인 에디스 마거리트 홀(Edith Margaret Hall)

어린 시절 사망한 에디스를 뺀 나머지 4명이 이 땅에서 봉사한 기간을 합치면 무려 73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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