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사랑한 선교사 18 사무엘 마펫 선교사 (Samuel A. Maffett, 1864-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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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장로교 발전의 거목 모펫(마포삼열) 선교사

한국이름 마포삼열(혹은 마삼열)로 더 잘 알려진 모펫(Samuel A. Maffett) 목사는 조선선교초기 미국 북장로교 교단에서 보낸 선교사로 한국 장로교회 발전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그는 지금은 북한땅이 되어버린 한국서북지역의 ‘선교 개척자’요 ‘신교육의 선구자’로 평양을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변화시킨 장본인이다. 수많은 교회와 학교들을 세우고 신도들과 제자들을 양성했을뿐 아니라 한국장로교회가 자랑하는 보수주의 복음주의 노선을 정립하는 등 한국장로교회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1864년 미국 인디아나주의 매디슨에서 태어나 청교도적인 엄격한 신앙을 가진 아버지 밑에서 자란 모펫은 1888년 당시 보수파 신학교로 많은 선교사들을 배출한 시카고의 매코믹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26세가 되던 다음해1889년에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부터 조선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1890년 1월 서울에 도착했다.

이미 서울에 와있던 선배 선교사들의 지도아래 현지훈련을 받으며 언더우드 선교사가 설립한 ‘예수교학당’ (경신중학교)의 교육사역을 하던 그는 만주의 로스 목사와 황해도의 첫 조선교회인 소래교회, 조선인 조사 백홍준, 서상륜 등의 활발한 선교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서북지역선교에 관심을 갖게됐다.

그는 6개월간의 한국어 연수교육을 마친후 1890년 8월 제1차 전도여행을 떠나 평안북도 의주을 거쳐서 황해도 소래를 방문하였으며 다음해 제2차 전도여행때에는 만주의 로스 목사까지도 만나보았다. 그는 현지를 직접 방문하면서 서북지역에 대한 구체적인 선교계획을 세웠으며 1893년의 제 3차 전도여행을 통해 토마스 목사가 순교한 평양을 자신의 선교중심지로 확정하였다.

의료와 교육을 통해 조심스럽게 복음전도의 길을 모색하던 초창기의 다른 선교사들과는 달리 모펫은 조롱과 야유를 받으면서도 직접 노방전도에 나섰으며 저녁에는 사랑방들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모펫 목사가 노방전도를 하다가 후에 회개하고 유명한 목사가 된 이기풍의 돌팔매에 맞아 피를 흘렸다는 이야기는 조선초기선교사상 잘 알려진 에피소드이다.

그는 1893년 평양에 첫 번째 교회인 ‘널다리골교회’를 세웠다. 후에 ‘장대현교회’로 개칭되어 해방후 북한이 강제로 폐쇄할 때까지 서북지역의 대표적인 교회로 성장했다. 그는 특히 조선인 조사들을 앞세워 평북지역에는 김관근, 평남지역에는 한석진, 황해도 지역에는 서상륜을 대표자로 임명하고 ‘팀웍’선교를 시행하면서 교회를 세우고 제자들을 키웠는데 이 지역에 그가 직, 간접으로 세운 교회들이 수없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모펫의 가장 큰 업적은 지도자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기독교 교육에 힘 쓴 것이다. 그는 조선인 목사 양성을 위하여 1901년에 김종섭, 방기창을 데리고 신학반을 시작하여 1903년에는 조선 최초의 평양장로교신학교 초대교장이 되었고 1907년에 최초의 졸업생들을 배출하였는데 한국장로교 역사상 처음으로 목사안수 받은 한석진, 방기창, 길선주, 이기풍, 양진백 등이 이 학교 출신들이다. 그는 1924년까지 교장으로 봉직하면서 그 후 신사참배문제로 학교가 폐교될 때까지 많은 장로교회 목사들과 여전도사들이 이 학교를 통해 배출되었고 오늘날 서울에 있는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전신으로 계승되었다.

그는 장로교신학교 외에도 평양에 3숭(三崇)이라고 불리우는 숭실전문학교, 숭실중학교, 숭의 여학교 등을 세워 젊은 인재교육에 힘썼으며 조선예수교장로회 8대 총회장을 역임한 후 10여년 동안(1919-1928)은 숭실학교 교장으로 시무하면서 일본의 압제에 맞서서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기독교 정신으로 무장한 인재양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모펫은 조선사람들을 자기민족처럼 사랑했다. 그는 선교여행시에는 조선사람들과 숙식을 갖이하고 사랑방을 돌면서 그들을 사귀려고 노력하였으며 조선의 예법까지도 익히고 특히 한국음식을 즐겨먹었다. 그는 어디가든지 한국인처럼 친밀감을 느끼게 했는데 이런 그를 조선사람들은 “마포 목사님”이라고 부르며 아버지처럼 따랐다.

1912년 ‘105인 사건’으로 한국의 애국지사들이 투옥되자, 매큔,·에비슨 선교사 등과 함께 이 사건이 사실무근의 날조사건이며 고문 등 비인도적 방법이 자행되고 있다 하여 당시의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에게 항의하고 미국의 장로회 본부에 일제의 만행을 보고하여 국제여론을 환기시키는 데 힘썼다.

한국의 독립과 발전에도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던 모펫은 일본관헌들에 의해 겉으로는 사랑과 자비를 공언하지만 조선의 정치적 혼란을 충동하는 선교사 무리들의 괴수로 지목되었다. 그는 감시와 박해를 받았지만 용감히 조선민중들의 편에서 일본관원들과 맞서 싸웠으며 해외에 진상을 알리는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기미만세사건이 일어난 다음해 1920년 4월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모펫은 “금일 조선에 가장 유망한 점은 조선민중이 에수 그리스도의 복음선전에 호응함이니 그리스도의 복음은 . . .독립적 정신을 가지게 하며, . . .민중의 복리를 위하여 노력하며 정의를 위하여 튼튼히 설지라.” 라고 자신의 소신과 사명을 분명하게 밝혔다.

26세의 젊은 나이에 조선을 찾아와서 오직 조선민족의 복음화와 독립을 위하여 모든 정성을 쏟았던 모펫은1934, 70세로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회로부터 은퇴하고도 계속 조선에 머물면서 일제의 신사참배강요에 맞서서 싸우다가1936년 일제에 의해 추방되었다. 조선땅에 묻히기를 바랐던 모펫은 다시 돌아올 것을 기약하고 미국으로 귀국하였으니 1939년 10월 24일 75세를 일기로 캘리포니아에서 별세하였다.

지금까지 미국 캘리포니아 카핀테리아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던 그의 유해는 한국장로교신학에 끼친 그의 공헌을 기념하고 조선땅에 묻히고져 했던 그의 생전의 뜻을 이루기 위해 70년만인 2006년 서울에 있는 장로회신학대학교 캠퍼스에 이장되어 젊은 신학도들의 발길을 끌고있다. 다섯아들들 가운데 둘은 한국에서 선교사업에 종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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