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 새겨진 십자가의 길 제 2장 12회 한국교회와 민족을 끝까지 사랑한 선교사 브루스 헌트 – 한부선 (1903-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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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부선 목사님과 사모님

Image result for 한부선■ 한부선 목사님(1)-한국출생

한부선 목사님의 아버지 한위렴 선교사님은 황해도 재령에서 1906년부터 1939년 은퇴하여 귀국하기까지 사역하셨습니다. 재령의 여름성경학교를 초창기 1907년에 몇 십 명의 참가자들이 1930년을 전후해서 2천여명으로 불어났습니다. 성경학교 수강생들이 황해도 각지에서 보따리 싸들고 1주일간 말씀을 배우러 오는 행렬은 장관이었습니다. 재령 동부교회, 서부교회를 건축하는 모습도 있습니다.

한부선 선교사님,
고신이 잊어서는 안 될 어른이십니다만, 많은 사람들이 고신 태동 이전의 한부선 선교사님을 많이 알지 못합니다.

평양에서 태어나, 재령과 평양을 오가며 청소년기를 보냅니다. (1903-1919)
시카고 근교의 휘튼 칼리지를 입학하나 뉴저지의 럿거스 대학교에서 졸업합니다. (1919-1924)
박형룡을 선배로, 한경직, 김재준, 송창근을 후배로 두고 프린스톤 신학교에 다녔습니다. (1924-28)
만주의 하얼빈 감옥에서 신사 참배 반대하여 봉천 노회에서 제명됩니다. (1939)
계속하여 신사 참배 반대 이유로 만주 옥중에서까지 투쟁하신 분입니다. (1941-42)

일제로부터 해방 후,
고려파 교회의 출발과 고려신학교와 칼빈신학교와 복음병원에 남긴 그 분의 족적은 자이언트의 그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경상, 전라 지역에 산재한 6.25 한국 전쟁 후 부모 잃은 고아들을 수도 없이 방문하며 도왔습니다.
돈 많은 미국 나라에서 왔기에 도울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한부선 선교사님이 소속하셨던 교단은 정통장로교회 (OPC: Orthodox Presbyterian Church)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 OPC는 자유주의로 치닫는 미국 북장로교에서 갈라져 나온 교단입니다. 때는 1936년. 일제가 식민지 팽창 야욕을 중국의 만주에까지 뻗치던 때입니다. 일제가 신사 참배 강요를 위한 조직적 압살 정책의 강도를 높이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갈라져 나온 교단, 참으로 보잘것없는 시골의 작은 교회로부터 후원 받으신 한부선 선교사님입니다. 그 분의 삶 자체가 얼마나 검소하였는지, 그 분을 직접 접한 많은 분들의 증언을 통해 지금도 들을 수 있습니다.

참고로, 한부선 선교사님과 OPC에 대해 전문가적 수준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정보를 가지시길 권합니다. 한부선 선교사님을 사모한다면, 고신은 OPC의 태동 역사를 배우시길 권합니다.
http://www.opc.org/what_is/the_opc.html을 방문해서 간단한 역사를 공부해 보십시오.
아세아 연합신학대학의 박웅규 교수가 내 놓은 “한부선 평전”을 참고해도 좋습니다.

■ 한부선 목사님(2)

그가 미국에 가서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선교사였던 아버지 한위렴 선교사의 외아들로 황해도 재령읍에서 성장하였다. 한국에서 성장하고 있는 동안 평양에 있는 외국인학교에서 공부하면서 한국 소년들과 격이없이 놀면서 자라왔기 때문에 한국어를 구사하는 솜씨는 한국 사람과 거의 같았고, 발음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의 음성은 부드러웠고, 한국의 정서를 나타내는 구수한 맛은 일품이었다.

한부선 선교사는 고신교단 창설뿐만 아니라 교단 창설의 핵심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고려신학교와 깊은 관계를 맺었던 선교사였다.
본래 미국 사람이지만 한국 사람이었다. 그는 1903년 6월 3일 평양기독병원에서 태어났다. 그가 미국에 가서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선교사였던 아버지 한위렴 선교사의 외아들로 황해도 재령읍에서 성장하였다. 한국에서 성장하고 있는 동안 평양에 있는 외국인학교에서 공부하면서 한국 소년들과 격이없이 놀면서 자라왔기 때문에 한국어를 구사하는 솜씨는 한국 사람과 거의 같았고, 발음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의 음성은 부드러웠고, 한국의 정서를 나타내는 구수한 맛은 일품이었다.

한부선 선교사는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 1919년 초여름 한국을 떠나 시카고시 서남쪽에 있는 기독교대학의 명문 튀튼대학으로 떠났다. 그는 한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났던 사실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였기 때문에 일본 군인들과 헌병들의 잔인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필자가 아는 한 한부선 선교사는 일본인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한부선 선교사가 목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은 그가 튀튼대학교 2학년때 티벳지방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다 돌아온 선교사가 대학에 와서 설교했을 때 그 설교를 듣고 회심의 경험을 가진 이후였다. 1923년 한부선 선교사의 부모님이 안식년으로 미국 뉴저지주로 오자 한부선은 마지막 대학생활을 그곳에 있는 러거스대학교에서 수업하기 위하여 전학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짧은 1년간이기는 했지만 부모님과 같이 생활할 수 있었다.

1924년 9월 한부선은 프린스톤대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박형룡 박사는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프린스톤신학교 3학년이었을 때 한경직이 1학년생으로 입학하였다. 프린스톤신학교에 입학하였을 때 프린스톤신학교는 보수와 진보 양 진영으로 나누어 치열한 신학사상의 싸움이 절정에 올라 있을 때였다.

1925년에 프린스톤신학생 대다수는 새로 복음주의학생연맹을 조직하여 가입하였다. 물론 한부선도 가입하였다. 당시 교장이었던 스티븐슨과 영어성경 교수였던 어드만 교수는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학생회 지도교수로 스티븐슨 교장은 어드만 교수를 임명하려고 하였으나 학생들은 메이첸 교수가 지도해 주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메이첸 교수는 가급적이면 전면에 나서기를 삼가하고 있었다. 다행히 구약학의 권위자였던 로버트딕 윌슨 교수가 지도 교수로 선임됐다.

또 한가지 언급할 것은 1924년의 미국 북장로교회 총회장은 저 유명한 보수신앙가 매카트니가 총회장으로 당선되어 다행이었지만 그 다음해인 1925년에는 프린스톤의 어드만 교수가 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어드만 교수는 스티븐슨 교장과 더불어 총회안에서 소위 ‘중간파’로 자처하면서 진보세력을 가급적이면 포섭함으로써 총회의 평화와 안정을 추구했던 인물들이었다. 결과적으로 총회안에 있던 중간파가 승리함으로써 북장로교회가 평화와 안정 을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반면에 북장로교회가 좌경화되는 것과 프린스톤신학교가 빠르트 의 신학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유주의 신학을 용납하는 교육기관이 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지난 70년간 프린스톤신학교와 북장로교회는 계속적인 자유화의 세속화의 길을 걸어 옴으로써 오늘날 미국 북장로교회는 내면적으로 성직자들의 동성연애를 묵인하는데 까지 이르게되었다.

한부선은 1927년 졸업하자 일단 선교사를 지망했다. 북장로교선교부는 선교사 지망자인 한 부선에게 묻기를 선교현장에서 자유주의자와 손을 잡고 같이 사역할 수 있겠는가를 물었을 때 한부선은 대답하기를 “자기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한부선은 선교사가 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한부선에게 신문했던 면접관은 1924년 어번성명서(Auburn Affirnation) 에 서명했던 자유주의적 성향이 농후한 선교부 기관 목사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한부선은 부모님이 일하고 계시는 한국(당시 조선)에 선교사로 파송을 받 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8년 한부선은 북장로교 선교사로서 충청북도 청주에서 첫 기간 (1928~1934)을 봉사하였다. 그는 새삼스럽게 한국어를 배울 필요가 없었다. 한부선은 부임 하자 마자 곧 선교사역에 착수 할 수 있었다.

한부선이 한국에 부임한 지 1년 후인 1929년, 스승이었던 메이첸 교수는 프린스톤신학교를 사임하고 필라델피아시에 새로이 독립신학교를 설립하였다. 그 신학교가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이다. 당시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안식년을 얻어 미국에 돌아가자 대다수가 프린스톤신학교에 가지 않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가서 신학의 재충전 을 하였고, 한국 학생으로서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입학한 학생은 김치선 목사였고, 그 다 음으로 입학한 학생이 박윤선 목사였다.

박윤선 목사가 1934년에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입학했을 때 한부선 선교사가 안식년을 얻어 미국에 돌아왔다. 그는 신학을 더 공부하기 위해서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들어가서 1935년에 박윤선 목사를 만나 알게 되었다. 한부선이 박윤선 목사보다 두 살 위였다. 당시 한부선 선교사는 박윤선 목사의 신앙생활과 학구적 태도에 감탄하여 말하기를 “자기가 안식년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갈 것 같으면 저와 같은 사람과 손잡고 같이 일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하였다.

그런데 1946년 그 꿈이 실현되어 부산 고려신학교에서 같이 봉사하였다. 한부선 선교사가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그 곳에서 큰 변화가 발생하였다. 메이첸 교수는 북장로교회의 선교정책을 비판하다가 소속노회에서 제명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1935년까지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졸업생을 각 노회에서 사취하여 목사로 임명하였으나, 총회의 결정과 지시로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졸업을 더 이상 시취할 수 없게 되었다. 남은 길은 새 교단을 만드는 길 밖에 없었다. 이 때 한부선 선교사는 자신이 속하고 있던 북장로교회를 탈퇴하고 새로 발족하는 정통장로회(당시 아메리카장로회)에 가담하였다.

한부선의 결단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 고독과 고난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하여 1936년 여름 그는 정통장로교회 선교사로서 새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는 부모와 친구들 이 속해 있는 북장로교회를 떠났던 것이다. 스승인 메이첸 교수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였다기 보다는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강했고, 뜨거웠기 때문이었다.

한부선은 북장로교선교사들이 없는 만주를 새로운 선교지로 정하고 만주에 있는 할빈시로 갔다. 그는 봉천노회에 가입하였다. 그가 부임한지 2년후인 1938년 9월 총대로 27회 발언 을 했다가 일본 형사의 유도로 내던 짐을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는 할빈으로 돌아 가 1942년 여름 마지막 포로교환선을 타고 미국에 돌아갈 때까지 3년간 만주 할빈시를 중심으로 26개처의 한국교회를 돌아 보면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다가 1941년 10월 체포 되어 1942년 6월 본국으로 송환될 때까지 9개월 동안 감옥에서 가진 간수가 가져다준 말똥 을 먹기도 하였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라면 말똥을 먹는 것 쯤은 문제가 될 수 없었다. 한부선 선교사가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운동을 가리켜 ‘언약운동’이라고 불렀다. 당시 한국교인들이 약 800명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약 500명이 반대운동에 서명하였다.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날 무렵 한부선 선교사는 산디아고시에서 발행한 신문을 볼 것 같으면 해방을 맞이하여 새로 탄생하는 대한민국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주관하고 있던 임시정부를 맞이하여 그 기관을 주축으로 새로운 정부를 조직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한부선 선교사는 교회이건 사회이건간에 친일파와 친일세력을 새로 수립되는 정부에 참여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견해요, 주장이었다.

한부선의 특징은 ‘진실’그 자체였다. 그는 꾸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허식을 싫어했다. 그는 한국과 한국국민을 사랑했고, 어디를 가든지 한국을 비난하는 사람에게 한국을 변호해 준 애국자였다.

그는 정부에서 주는 상을 받고도 남는 인물이지만 그런 것하고 인연이 먼 사람이었다. 그의 탄생 100년을 맞이하는 이 시점에서 고신 교단은 가슴에 손을 얹고 그의 행적을 기리면서 그와 나를 비교해 보는 것이 어떨지 착잡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

(2003년. 기독교보 / 총신대 홍치모 교수)
◀ 총신의 박형룡 교수는 4대 선교부(남, 북장로교 선교부, 호주장로회, 캐나다선교회)와 협력을 모색하면서 부임한지 얼마되지 않아 고신교장직을 떠났다. 그러나 그러한 그도 10여년후 통합측과 결별시 4대선교부의 지원을 잃게 된다. 한국의대부분의 미션계통학교 즉 연세대, 계명대, 숭실대, 서울여대 등이 모두 자유주의 하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후 합동은 고신과 합하여 정통장로부의 협력을 얻게 된다. 정통장로부는 이후 고려파로 환원하지 않고 합동 고신 교단 모두와 협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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