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세계관 강의 박영선 목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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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세계관 강의 박영선 목사

제1강의 다원주의가 형성된 사상적 과정 : 벧후3:3~7
8권의 필독서, 특히 ‘완전한 진리'(약 800쪽) 추천

오늘날을 현대사회, 다원주의사회라 한다. 다원주의-사상, 지성사의 흐름에서 파악해야 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세상이다.
16세기 ~ 20세기 초 : 근대사회(모던)
전 근대 – 근대 – 근대 후기으로 분류
근대시대의 시대정신을 이해해야 한다.

신학의 시대, 권위의 시대 – 전 근대시대(중세시대)
16세기 이전 : 전 근대사회-중세시대라 한다.
이성의 시대 – 근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다원주의), 통일과 종합을 포기한다는 말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보편적인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 우리의 가치관, 믿음을 설명할 수 없다. 신앙을 보편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중세 때는 기독교가 힘으로 세상을 지배하였다. 세계관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세상,나,인생에 대한 성찰– 종합된 체계가 필요하다. 그래서 절대 좌표가 있어야 한다.
오늘날은 각자의 기준, 척도를 가진 세상이다.

중세에는 세계를 신학적으로 설명-대표적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초월(은총) : 상층부

자연 : 하층부

보이는 자연이 전부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하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것이 은총과 자연의 이분법을 만들었다. 자연보다 은총이 더 우월함을 강조하기 위해 나눔. 그런데 이런 의도와 달리 자연과 은총이 분리되었다.

믿음, 신학 — 은총
이 세상의 사물에 대한 지식 — 자연
자연은 이성으로 연구하는 대상, 경험으로 확인하는 영역이 되었다.
자연이 초월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별개의 범주로 나눔.
신앙과 이성은 분리됨 → 계시와 신앙이 필요 없다고까지 나감,

종교개혁의 범주 3가지로 이루어짐 – 일반적 종교개혁, 카톨릭내 정화운동 등
일반인에게는 기독교를 초월로 밀고 자연을 독립시키는 자연신론적 종교개혁이 르네상스이다. 성경으로 경전으로 삼지 말고 옛날에 사람들이 생각했던 철학이나 자연에 대한 이해, 과학으로 이해하자.

여기서 합리주의가 태동된다. 이성이 신적 계시와 상관없이 독립. 계몽주의 때 크게 대두되었다. 근대의 시대정신이 계몽사상이다. 계몽주의란 이성이 삶의 기초를 제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체계화한 것이다. 신앙적 독단을 해방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함.

계몽주의의 신조 : 이성의 자율성→ 이성으로 자연을 이해하자. 계시가 필요 없다. 외적인 권위를 부정, 거부함. 이성에 의한 합리성으로 모든 진리를 파악했다.
전근대시대에 절대좌표는 기독교였다.(하나님, 성경..) 근대 이후에는 자기 나름대로 절대좌표를 만들었다.
→ 데카르트 등장 (절대좌표를 제공함: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인식론적인 자아가 절대좌표의 원점이다. 인식하는 ‘나’가, 개인이 절대좌표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생각하는 모든 인간으로 절대좌표로 바뀜. 생각하는 자아가 정신적인 존재임을 입증하려고 했다. 자연이 전부가 아니다. 초월의 영역에 우리가 있음을 강조하려 했으나 그의 말은 오용되었다. 물질의 세계와 정신의 세계로 나뉘게 되었다. 정신세계는 검증, 설명할 수 없는 정신적 영역으로 되어 배제되었다. 과학에게 지식의 독점권을 부여하였다. 인간의 삶은 과학으로 설명, 검증되었다. 다른 나머지는(초월의 영역) 사적인 신념이나 문화적 유산이나 전통으로 취급 당함.

칸트를 거치면서 하층부는 검증가능한 사실의 영역이 되었고 상층부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가치의 영역으로 되었다.(도덕, 윤리 등) 사실과 가치로 이분법으로 되었다.

당신은 예수믿어, 난 아니야 → 기독교가 사실, 보편성이 아니다는 뜻이다.
계몽주의는 사실의 영역이 가치의 영역으로 점점 잠식함. 이유:과학적 성취가 자신감을 불어일으킴. 예를 들면 중세 때는 벼락,홍수도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했으나 과학적으로 설명함으로 예전에 초월로 인식된 것이 과학적 영역으로 나오게 되었다. 이로서 점점 기독교는 밀려나기 시작하였다. (영국은 부부싸움에서 감정이 나오면 짐승 취급한다. 그들은 논리적으로,합리적, 이성적으로 판단한다.) → 자연주의적 이해, 설명이다.

상층부는 개인적, 비인지적인 경험으로 되어 버렸다. 보편성도 없고 사실도 아니다는 것이다. 인류는 계몽주의로 시작된 인간 이성, 과학이 만들어 내는 유토피아로 진군하였으나
두번의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사상이 무너지고 다원화로 가게 되었다.
과학적 발전은 인정되나 전쟁을 통해 지성,정신에 대한 회의가 시작했다. 이성과 합리가 새로운 기준과 질서, 통일을 만들어 주리라는 것이 이로써 폐기되기 시작했다.
절대좌표가 이로써 부재한 상태가 되었다. → 각자 자기의 소견의 옳은대로 행하게 되었다.

지성사,사상사로 살펴보면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기독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기독교는 믿어야 보편적인 진리가 되기 때문에,
그들은 믿지 않는다. 지금은 절망에 몸부림치는 세상이다. 그러나 그들은(다원주의자)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상한 낙관론이 이 시대를 속이고 있다.
기독교내에서 이 형태가 ‘적극적 사고’이다. 무엇에 대한 적극적인가?
잘 될 것이라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근거는 없다. 잘 될 것이라고 믿으면 잘된다는 순환논리이다. 사람이 무엇에 근거하여 자기가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 근거는 없다.

기독교를 설명함에 있어서, 변증에 있어서 기독교 세계관이 중요하다.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 → 창조, 구원, 심판이다.
세상은 심판, 창조 등을 거부한다. 즉 하나님을 거부한다. 지금까지 변한 것이 없다고 기롱한다. 세상은 기독교 신앙을 의지적으로 반대한다. 이것이 죄성이다. 다원주의가 가지는 현실속에서 적극적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통하여 절망에 와 있는 상태를 속이고 있다. (미국이 앞장선 것 같다.) 서구사회는 돈이나 과학이나 인간의 이성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 인정하였지만 인류 정신이 파탄됨을 시인하였으나, 그러나 그들은 기독교신앙으로 가지 않는다.

이 사이(근대정신 붕괴-기독교로 복귀)에 물질주의가 끼어 들었다.(미국이 앞장) 열심히 살자고 한다. 결국 인생은 늙고 병들고 불행해 짐을 속이고 있다. 상업적, 이기적으로 만들었다. 나만 잘살자는 속물이 되었으나 오늘날 우리들은 기독교 방법으로 성취하려고 하고 있다. 이 세계를 기독교 세계관으로 해석해야 한다. 기독교내에서 신앙을 이성과 합리로 설명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 이것이 교의이다. 믿고 순종하는 진리이다. 도그마이다. 인간의 행복이나 진리를 발견하지는 못하였지만(정신과 사상은 폐기처분되었으나) 비판정신을 그들은 꼭 쥐고 있다.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다. 다원주의사회는 기존의 명제, 권위 등에 대해 거부한다. (하나님, 절대권위, 성경 등을 말한다.) 교회사에서 교의는 권위에 의해 주어지는 것으로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했다. 현대 사회는 이러한 교의를 비판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지적인 능력이나 특징으로 간주한다. 순종을 맹신과 무식이라 한다.

우리는 계시가 지식의 원천이라 여기며 세상은 이성이 지식의 원천이라 한다.
정보의 출처는 계시이다. 이성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관찰한 기록이며, 사물을 이해하는 수단이다. (하나님이 창조주이기 때문이다.) 이성이 진리를 만들거나 알아낼 수 없다.
자연의 영역에서 세상, 인간을 이해하려고 했다.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제2강 다원주의에 대한 기독교적 해결책 : 롬3:23~24

지성사가 이성중심으로 시작하여 합리주의에서 다원주의까지 왔다. 기독교는 세계,역사,인간,삶을 어떻게 담아내는가? 기독교 진리의 정당성은 초월과 자연을 모두 설명하는데 있다.
초월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있다고도 증명할 수도 없다. 과학적 방법으로 설명할 수 없다.
종교개혁자는 우리가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구분이 되었다고 설명했다.
초월도, 자연도 하나님이 통치하는 방법이며, 하나님을 나타내는 영역이다.
시19:1에서 일반계시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있다. 자연 속에서 얼마든지 하나님이 누구신가가 드러난다. 하나님은 자연계를 창조하신 분이시다.
자연계에 하나님의 영광이 계시되어 있지만 죄인인 우리가 알지 못할 뿐이다.
세상은 예수님을 통해 창조되었지만 세상은 그를 알지 못했다.

해를 설명하려면 ‘저게 해야’라고 설명한다. 장님이 눈을 떠야 볼 수 있다.
인간이 죄를 지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고 그래서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우리가 못보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

종교개혁의 가장 큰 성취, 공헌은 초월과 자연을 포함한 세계관을 갖게 되었다.

‘포세이돈 어드벤처’는 큰 신학적 주제를 갖고 만든 영화이다.
폭풍으로 배가 뒤집어져 있는데 선원은 가만히 있으면 구조대가 온다고 했다.
(사실 구조신호를 보내지 않았다.) 이때 하나님을 믿지 않은 신부가
배의 거꾸로(배의 간판으로 가려면 물 밑으로 가야 함) 들어가 탈출하는 이야기 이다.
우리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를 모른다면 우리는 어떤 것도 정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허무주의만 남는다. 기독교가 말하는 세계관은 하나님이 자연을 만드셨고
인간을 만드셨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목표,가치관,방향들이 옳게 자리를 잡는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가는 것이다. 구원은 창조 질서의 회복을 말한다.
초월계만이 아니다 초월과 자연을 포함한 모든 영역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신자의 생활이다.
한국교회의 신자들은 구원이 너무 내세 지향적이다.
우리의 구원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지금 여기서 실천하고 누려야 하는 책임과 특권이 있다.
한국교회의 전통은 박해를 통해 소개되었기에 신앙에 대한 ‘비장’이 있었다.
신앙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후 세대에서는 예수 믿는 것을 흐지부지하게 만들고 신앙을
개인적 영역에서만 믿게 하였다. (예: 잠잘 때 잠자리에게 기도하라)

자연은 모든 사람에게 베푸시는 은혜이다. 이것이 일반 은총이다.
초월은 특별 은총이다. 이렇게 자연과 초월이 분리된 것은 죄 때문이라고
종교 개혁자들은 설명했다. 구원을 얻고 나서는 자연 속에서 얼마든지
하나님을 볼 수 있다. 세상사람들은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구원받은 우리들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초대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로 살게 된다. 한국교회의 실수는 복음주의적인 것,(복음주의운동:구원-회심에 중심을
둔 운동이다)을 많이 강조하는데 있다. 초월을 너무 강조한다. 초월이 자연을 누르고 있는 형국이다. 시험을 볼 때 기도를 해서 잘하는 경우와 공부를 해서 잘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기도해서 나온 결과는 신앙적이고 공부를 잘해서 나온 결과는 세상적이고 과학적이다고
생각한다. 성속의 분리 개념이다. 이것이 극복되어야 한다.

성속을 이러한 영역으로 분리해서는 안 된다. 죄의 문제이다.
구원받은 이후에 자연에 넘쳐나는 하나님의 질서와 통치의 공의로움에 이해와 순종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신앙이다. 공부를 잘 하려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신앙이다.
마22:36~ 에서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은 ‘하나님의 중심되는 뜻’이다라는 말이다.
하나님사랑이 이웃사랑으로 나와야 한다. 초월의 경험을 가지지만 자연이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요13:34~에서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은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 즉 초월에 한정되어서는 안되며(옛날 사고방식) 그러나 이것이 이웃사랑(서로간의 사랑)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성속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
초월이 우월함을 증명하는 것을, 즉 하나님의 자녀됨의 증거가 믿지 않는 자를 공격하는 것으로 나온다. 우리는 굉장히 원색적이다. 빛이 아니라 화염방사기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자로 자기의 자리매김을 해야 한다.
향기를 발해야 한다. 요일4:20~ 초월을 경험하면 자연에서 신자다움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났다면 이 현실(자연)에서 다르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줄서기(질서)를 잘한다.
신앙이 자연계에 있다. 기독교의 특징은 초월에 있지 않고 계시에 있다.
우리의 기도는 주문과 다르다. 누가 왜 열어주는지 모른다. (열려라 참깨..)
기도는 따지는 것이 있고 기도의 대상과 내용이 있다. 계시라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가와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뜻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신앙생활이란, 구원받은 자는 영적인 각성을 통해 인간 본연의 지위를 가지면서 상식과 교양이 생긴다. 세상에서 우리는 제사장으로 서 있음을 알아야 한다. 모든 신자됨으로 하나님이 함께 동행하며 역사하신다.

상층부로 하층부를 압도하여 항복시키려고 하지 않아야 한다. 과학은 현상을 설명하지 그 이유,의도, 목적을 설명하지 않는다. 진화론이 틀렸다는 것은 모든 과학자가 안다. 원시인의 두개골이 인간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 8년 전에 공포되었다. 대안이 없기에 그냥 우기고 있다. 과학정신이 기독교 신앙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을 포기했다. 과학과의 싸움이 일종의 신앙과의 싸움임을 알아야 한다. 논쟁으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가장 큰 무기는 구원받은 자의 참다운 영광된 모습이다. 허무주의로 갈 수 밖에 없는 인류가 기독교에는 답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세계관과 자연을 담아내는 기독교 진리의 큰 틀을 가지지 못하여 우리 기독교인들을
광신자, 맹신자로 불리운다.

자유주의는 하층부의 자연주의를 수용하고-과학으로 설명되는 곳으로 인정
상층부만 국한. 자연과 역사와 단절된 새로운 기독교를 창조하려고 했다.
상층부는 상징과 은유로 만들어 버렸다. 기독교는 개인적인 신념, 종교적인 사유로
만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 속에서 우리의 믿음의 내용을 증거해야 한다.
초월을 붙잡고 있으면 자연 문제가 해결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빌4:4~7)
초월적 내용으로 모든 것을 알았으니, 자연이 하나님이 다스리는 영역으로
알았으니 이제는 세상사람들이 자기 힘으로 살고 자연에서 이유와 가치를
만들어 내려는 삶을 살지 말자라는 이야기이다. 예, 돈을 사랑하지 말라
세상의 가치이다-돈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
초월로 인하여 확인된 세계관으로 진실함, 의로움, 거룩함, 성실, 정직으로 살아야 한다.
무슨 일이든지 전체 틀을 보아야 한다. – 하나님의 창조주되심, 구원자되심, 심판자이심인 것 (빌4:8)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 틀에서 물어야 한다.-방향과 판단이 선다.
초월과 자연을 이분법으로 나누면 노력하자가 아니라 기도하자라고 한다.
성실이 살아야 한다.-먹고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마6:33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한 삶의 현장이 세상 동료를 만나는 자리이다.
하나님의 자녀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신실, 공의로움, 희생 등
우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이 세상에서 이기게 되어 있다.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받으시기를 기뻐하신다.
우리가 있는 이 곳이 선교지며, 일터며 싸움터며 하나님이 영광이 기적으로
결실되는 곳이다.

제3강 현대화와 세속화에 대한 설명 : 딤후3:1~5

서구역사가 인본주의, 합리주의로 흘렀다. 과학적 업적을 근거로 나아갔으나 실패하였다.
현대화란 사회가 제조, 상업을 목적으로 도시주변에 사회가 재편성되는 과정이다.
과학의 발전을 인해 산업혁명이 일어난다. 기계문명의 발전을 도시화가 시작된다.
제조, 생산이 대량으로 되고 경제 규모가 대규모로 되었다.
도시화의 과정이 현대화이다. 현대화가 진행되면서 생기는 특성이 현대성이라 한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전통과 권위가 있는 세계에서 이런 것 없이(전통,권위 등)
모이는 도시생활을 하게 되었다. 삶의 방식과 삶의 배경도 변화되었다.
집안과 집안이 알고 있는 사회에서 서로간 아무도 모르는 삶으로 변화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특성을 이해해야 한다.

도시집중현상-현대화가 가져온 주요한 특징으로 인간의 삶에 있어 두 가지 구별을 낳게 되었다. 삶에 있어서 공적인 관계와 사적인 관계로 나누었다.
공통적 목적을 위해(상업성) 합친 영역-회사를 말한다. 기업의 이윤을 위해 모인, 기능적인 묶음이다. 개인적인 주장은 불필요한 곳이다. 공적 세계의 특징은 개인의 중요성은 됨됨이, 가치, 신념, 신앙이 아니라 그 개인이 행하는 일에 있다. 그 사람이 집단의 필요에 충족한가 이다. 상업성과 효율성에 필요한 기능만 남게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에 살고 있다.
이런 사회의 특징이 다원주의이다. 도시는 다양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공적인 영역은 공통된 경제적 이익을 위해 묶여있다. 개인의 가치관을 축소시켜
최소의 공통분모만 갖게 하였다. 기업의 이윤을 위해 쓸모 있는 기능만 남게 되었다.
도시윤리는 대중윤리와 공존할 수 있는 우호성이 필요하다. 개인적인 문제로 싸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종교, 정치문제, 도덕적 판단 등….

모든 영역에 절대적인 것은 사회적인 에티켓에 의해서 유보내지 제거되어야 한다.
–누가 대통령되었으면 안돼!-이런 말은 하면 안 된다.
그래서 이런 기술시대에는 필요한 효율성만 남게 되었다.
(그 사람은 누구냐? 벤츠 타…이러면 금방 알아 먹는다. 인격과 됨됨이는 의미가 없다)
현대성의 공적 영역은 절대적인 이야기를 꺼낼 수 없다.-신념,신앙,절대적인 주장 등
이런 것들은 개인적인 영역에만 이야기해야 한다.
정직, 진실, 겸손 등은 공적인 영역에서 사용할 수 없어 절대적인 기준이 아닌 것처럼 되었다. 이전의 할리우드 영화에 권선징악, 사필귀정이란 절대적인 기준이 있었는데
이제는 악당의 실패하는 끝장면에서→ 악당이 잡히는 장면없이 끝나고 → 드디어 악당이 악당짓을 통해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끝난다. 예:경찰서를 털어라..

죄, 정의가 모호해진다. 각각 다른 기준으로 적용하는 상대주의가 되었다.
이러한 공적, 사적 영역의 구분함으로 가장 중요한 부작용은 현대성이 사람들을 시간과 공간의 연결고리(전통사회,주거환경 등)에서 거대한 비인격적 현대 문화 속에 끌어드렸다. 모두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 안에 있다. 나의 신념이나 신앙이 공적인 동의나 확인을 받을 수 없는가-이것이 우리들의 의문점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더욱 초월로 나아가 자연과 초월이 더욱 분리될 수 있다.

셋째 현대성이란 문화의 중심지로서의 의미이다. 문화를 생산해 내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을 조종한다. 정치, 경제, 교육, 매스미디어 등이 우리의 생각을 조정한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다수를 따라 갈 수 밖에 없다. 유행을 따라야 한다.
학교는 인본주의적 합리주의로 기초된 학문내용을, 방법을 가르치는 곳이다.
교육과 과학을 부인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본주의적으로 가르치면 하나님에 대해
가르칠 수가 없다. 저들에게 우리들이 주장하는 차이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런 체계들은 비인격적이고 익명성을 중심으로 한다. 유행 같은 것으로 하나의 풍조로
존재한다. 우리들이 모여서 개인적인 인격이 동원된 이야기를 할 수 없다.
그래서 스포츠와 드라마 이야기 밖에 할 것이 없다. 우리가 휘둘리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런 특징을 막나하여 세속성이라 한다. 여기에는 절대라는 것이 없다. 일회성, 상대성만 있다. 회사에 신우회를 만들 수 있으나 교회로 만들 수 없다. 이런 현대성을 가진 우리를 현대인이라 한다. (이전은 전 근대인이다) 중세의 실패는 신앙으로 사람을 강요한 것이다. 강요와 억압으로 신자로 만들었다.

다양함과 풍요함의 유혹 속에서 기독교 신앙의 절대 우위를 설명해야 한다. 우리는 이 문제를 외면하고 우리는 원색적인 초월성으로 간다. 현대성의 특징들은 현대사회안에서 생겨난 특성이다. 현대성, 세속성은 더 이상 어떤 초월적인 질서에도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는 전망과 가치를 말한다. 초월과 절대를 외면한다는 의미에서 세속성이라 한다. 오늘날 세계는 도시화되어 간다. 도시로 인해 편리해 지나 더욱 세속화 되어간다.

세속주의는 개인의 삶에서 신성의 영역을 빼앗아 갔다. 영원한 신앙체계를 개인적인 영역으로 축소시켜 호주머니나 금고에 넣게끔 하였다. 이랜드가 하나님의 기업인가? – 기독교의 기업이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기업은 이윤을 위해 있는 곳이다. 이윤을 진실하고 정직하게 내는 것은 가능하나 기독교기업 이름을 붙이는 것은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신앙을 기업보다 앞세워 공통적인 분모나 특성으로 할 수 없다.
세속주의는 신앙을 개인적인 소유로 만들었다. 기독교내에서 기독교를 세속화한 것이 문제이다. 예를 들면 복이라는 말을 성경이 정의하는 것과 현대사회가 정의하는 것과 다르다.
오늘의 본문의 말씀은 돈으로 하는 것에 목적을 두는 것에 경고의 말씀이다. 개인적인 이기주의에 빠질 수 있다. 신앙은 갖고 있으나 신앙의 진정한 능력들 즉, 영원성, 감동, 인격의 변화 등은 없다.

오늘날 교회는 신앙의 증거나 승리를 세상이 추구하는 동일한 내용으로 설명한다.
예수를 믿었더니 병이 낫고 부자가 되었다.- 하나님이 한 영혼을 항복시키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기는 하나 그러나 영구한 목적은 아니다. 인생 전체를 담아내는 신앙을 해야 한다.

우리의 신앙의 힘은 하나님이 하나님되심에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서 하나님의 뜻을 주신 약속들에게 있다. 세상의 삶의 정황 속에서 믿지 않는 자와 함께 하여 그들과 다른 하나님의 통치를 받은 자로서 세상을 이해하고 대처하는 차이를 보여야 한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이 드러나는 기적의 현장이 되어야 한다.

제 4강 현대화와 세속화에 대한 기독교적 해결책 : 요3:16

현대란 포스트모던시대이다. 계몽주의는 모던이다. 후기 계몽주의가 포스트모던이다.
모든 가치의 보편성을 해체하려는 사고가 이 시대의 특징이다. 다원주의시대라고 한다.
절대적이고 유일한 기준과 질서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현대가 세속성을 그 정신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초월성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기준을 부인하는 것은 문예부흥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중세 기독교가 인간에 대해 억압했다고 생각했기에 현대에서는 기독교의 유일성에 대하여
거부한다. 타 종교에게는 호의적이다. 동양정신에 (관명의 정신-인격적인 신이 없다) 관심이 많다. 자연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영역이고 통치하는 영역이다. 동양사상에서는 자연으로 회귀함으로써 나도 없고 너도 없는 그래서 분쟁이나 갈등이 없는 것이다.

서구문명,문화,사상의 시각에서 절대와 초월을 거부하고 현대에서는 정신,사상에서 아무런 기초가 없다. 현대사회에서는 공적인 영역에서 정신적인 대화를 할 수 없고 기능과 활동만 있다. 현대사회에서는 바보가 제일 나쁘고 영악한 것이 낫고 무능이 천하의 역적취급을 받는다. 현대인은 이러한 정신적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 스포츠와 드라마에 몰두한다.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없다. 다른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다원화 사회의 틀을 깨는 것이다.
기독교가 다원화 사회에서 제일 적응하기 어렵다. 이 시대의 예의, 질서가 깨어지기 때문이다.-절대적 기준,원리 등… 기독교가 독선,건방지게 보인다. 현대사회 문화는 활동과 여흥밖에 없다. 헐리우드 영화를 보라-스토리가 간단하다. 개인의 고민, 정신적 사상이 없고
볼거리로 채워진다. 보아도 90%이상 생각나지 않는다. 정신적 도움을 얻는 것도 자기를 돌아보는 것도 없다. 현대사회의 2가지 부작용은 상실감, 소외감이다. 인간이 기능으로 대접 받고 요구 받는다. 또한 사회 구조 속에 부속품으로 존재하는 익명성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느 교회, 어느 회사에 다닌다’라고 말할 뿐.. ‘나는 누구이다’는 없다…..

개인의 가치가 사회 구조 속에 함몰된다. 기독교가 가지는 인간에 대한 평가는 존엄하다.
과학과 싸우자는 것이 아니라 과학은 하나님의 허락하신 통치방법에 대한 우리에게 알게 하신 지식이다. 과학이 인생, 세계를 담아낼 수 있다는 것은 과학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삶에 이의를 제기해야 할 책임이 있다.
우리는 기능화, 실용화된 환경을 거부할 수 없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상을 제시해야 할 책임이 있다. 풍요와 재미있는 사회이지만, 인간으로서 대접받고 있지 못함을 우리는 알고 있다. 부품으로 이해된다.-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해서 구원했고 영생을 주셨다. 사랑한다는 것은 기능적인 것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의 위대성은 사랑에 있다.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해야 한다. 요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과 그를 보내신 예수님을 아는 것이다. 안다는 표현은 지식적이 이해가 아니라 부부관계처럼 특별한 관계를 말한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관계처럼 우리를 그러한 관계로 부르신다.(구원의 의미)
삼위하나님의 교제와 연합으로(형상의 의미) 우리를 만드셨다. 성경은 우리가 공동체를 위해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인간은 자율적인 개별적인(다원주의에 반하여)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다. 기능적이기 보다 본질적인 것이다. 이웃 앞에서는 존재이다. 함께하는 자로서 존재한다. 기독교 신앙은 수직적인 관계를 확인할 때마다 이웃과의 수평적인 관계를 묻고 있다.

요일3:14 영생을 얻으면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한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과 화목 되자마자 이웃과 화목 된다. 우리가 이웃과 싸우는 것은 죄 때문이다. 이웃에 대해 개별적으로, 투쟁적인 관계로 서는 것을 말한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본성적인 종교성이다. 과정과 절차를 무시하고 바로 초월로 가려고 한다.)

엡4:17 무지,굳어짐으로 하나님의 생명에서부터 멀어져 있다.
죄의 문제에 대해 무지한 현대사회에서 구원이 시급함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 신앙은 윤리, 도덕적 가치로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우리들은 역사와 인생, 현실에 대해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는 답과 시각이 있다. 신앙적인 이해와 지식이 필요하다. 초월일변도의 기독교의 주장은 자연을 담아 낼 수 없다. 초월과 자연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골3:9 예수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이 구원은 세계,인류를 종합하는 질서이며 영역이다.

고후5:15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다. 화목케 하는 직책을 주셨다. 기독교의 신앙은 하나님과 화목하며 모든 사람에게 화목으로 부르는 것이다. 엡1:7 그리스도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신다. 하나님의 통치로 말미암은 화목, 사랑, 감사 등이 생긴다. 하나님의 통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을 말하는 것이다. 믿지 않는 자에게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편협한 적대감을 가져서는 안 된다. 이것이 서구 기독교가 실수한 부분이다. 기독교 신앙으로 이웃에게 서야 한다. 전도의 대상으로뿐 만 아니라 그들과 다른 모습으로 서야 한다.
변화된 모습, 우리만이 가진 답으로, 참다운 이웃으로 그들 앞에 존재해야 한다.

양과 염소의 비유를 생각하라. 심판의 기준을 말하는 데 그 비유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여기서 ‘내 형제’는 모든 인류를 말한다. ‘작은 자’ 란 이해 관계없는 자를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앞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민망히 여기고 불쌍히 여겨야 한다.

이해관계나 논리를 뛰어넘는 사랑이 필요하다. 예수 때문에 인간성의 회복(하나님의 형상)이 되었다. 이웃 앞에 자비를 책임져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죄를 해결하지 않고는 답이 없다. 물질의 풍요, 과학적 발전이 문제가 아니라 죄인이 그것을 잘못 사용하기 때문에 문제이다. 죄인이기에 잘못 사용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먼저 죄의 문제를 풀어야 한다. 원색적인 간증(또는 복음전도)은 기독교에 입문하는 방법일 수 있지만 전부는 아니다. 지금의 시대는 다원화된 시대임을 알아야 한다. 지식과 지성과 인격이 동원된 고급적인 차원이 필요하다. 기독교의 깊이.높이.넓이로 인생과 세계를 담아야 한다.

5강-복음주의에 대한 설명 : 계3:7~13

한국교회의 신학(신앙내용)과 신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보수주의 교회는 복음주의 색채를 띠고 있다. 그러나 복음주의에 대해 우리는 오해하고 있다.
빈곤한 신학과 열정적인 신앙이 복음주의의 특징이다. 복음주의는 어떤 신학적 신념들에 기초한 영적 갱신과 부흥운동이다. 복음을 선포하려는 역동적 운동이다. 복음주의는 뿌리를 가진 운동이다.

오늘날 복음주의는 18세기 대각성운동에서 일어난 신앙운동에 기초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근본주의와의 차별을 드러내며 보수주의를 지키려는 운동이다. 이 운동이 신복음주의 운동인데 우리는 신복음주의 운동을 그냥 복음주의라고 한다. 헤롤드 오켕가, 칼 헨리, 빌리 그래함이 주도적인 지도자들이다. 일어난 이유는 경직된 근본주의와의 차별로 일어났다. 근본주의는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일어난 운동이다.

복음주의의 특징은,
첫째, 회심주의, 즉 개인적 회심을 체험적으로 확인하려는 주의이다.
둘째, 성서주의, 성서를 궁극적인 권위로 받아들인다.
셋째, 활동주의, 복음전도에 우선권을 주고 선교를 강조
넷째, 십자가 중심주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강조하며 중심을 둔다.

복음주의는 신학적 사상보다 운동 쪽에 훨씬 강하다. 성서에 근거하면서 경건하고 헌신적인 운동이며 풍토이다. 종교개혁, 청교도 운동, 경건주의 운동, 부흥운동 등에 뿌리를 둔 운동이다. 복음주의의 중심적인 축은? 첫째, 종교개혁과의 관계이다. 종교개혁의 중심주제가 복음주의의 축이 된다. —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종교개혁의 중심 내용들이 복음주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복음주의는 먼저 회심과 복음전도에 강조를 둔 운동이다. 둘째, 청교도운동(17세기)과의 관계이다. 종교개혁의 지적 성향과 크리스챤 삶의 경험적 측면을 강조한 것이 청교도운동이다. 칼빈주의의 선택교리에 의해 일어난 불안에 대응해서 새로운 종류의 경건을 일으켰다. 구원에 대하여 구원이 하나님의 선택에 좌우되는 것과 더불어 개인적으로 체험적 확인이 강조되었다. 중생의 체험을 강조. 형식적 신앙 반대.

셋째, 경건주의와의 관계이다. 경건주의는 교리화된 기독교 경직과 형식에 대해 생동감을 강조하며 기독교는 삶과 실천에 존재함을 내세웠다. 넷째, 부흥운동(18~19세기 영국과 미국)과의 관계이다. 종교개혁적 신앙을 강화하는 영적 각성물결이다. 회심과 회심에 대한 체험, 경건한 성결한 삶, 도덕강조(인권강조, 사회개혁) 선교강조 등이다. 신앙과 시대적 사회 앞에서의 실천운동이다. 미국 복음주의의 특징은 대각성운동을 전통으로 하며 정치와 종교분리를 이루어 내었다. (원래 재정은 정부가 내고 실천(병원, 학교, 자선단체 등)은 기독교가 담당했지만, 이단들도 정부에 대해 동일한 재정지원을 요구함으로써 문제가 발생하였다. 국가는 종교의 자유를 주었지만 차별할 수 없어 종교와의 분리가 되었다. 정부의 지원이 끊어지자 그래서 교회에서 재정적 어려움이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헌금을 강조하였고 목사들이 대중성이 띠게 되었다. 더 많은 사람을 교회로 데려오게 하려는 타협이 일어난 것이다.)

교인이 많으면 활력이 생기지만 실용성에 대한 관심이 켜져 원리에 대한 관심을 압도하게 되었다. 부흥운동은 개인적 종교경험과 지성의 엄격성과의 신학적 갈등을 일으켰다. 각자가 자기가 체험한 바에 따라 자신 신학을 만들어 내었다. 분파운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복음주의운동은 신학적으로 종교개혁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신학적 운동이 중요하다.

계몽주의 이래로 일어난 인본주의 사상으로 말미암아 자유주의가 일어난다. 이러한 보수주의인 프린스턴신학, 세대주의 신학은 연합하여 자유주의를 대항하였다. 이러한 좋은 면에도 불구하고(정통교리 수호) 근본주의는 기독교 세계관을 제시 못하고 반지성적으로 흘렀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교인들은 초월적, 체험적, 신비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설명하지만 이성적, 신학적, 넓은 문화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한다. 1940년대 근본주의의 대안으로 신복음주의는 탄생하였다. 개신교의 정통교리를 유지하며 학문적 연구에 가치를 부여하고 사회문제에 적극적 관심을 가진 온건한 근본주의자들이었다. 근본주의는 대화를 거부하고 폐쇄적인 것에 대해 신복음주의는 이를 반대하고 적극적인 면을 강조. 세상을 긍정, 문화를 포용하는 비전을 가졌다. 자유주의와 근본주의와의 중간쯤 있는 것이 (신)복음주의이다. 한국의 복음주의는 신복음주의가 아니라 청교도운동, 경건주의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신복음주의적인 경향은 없는 편이다. 세계관 제시나, 학문적 연구, 문화적인 면이 없기 때문이다.

복음을 현대에 맞게 변질시킨 것(철학으로 바꾸어 버림)이 자유주의의 최대 결점이었다. 한국교회 복음주의의 문제점은 지성적 빈곤이다. 급진적 자유주의와 근본주의의 폐쇄성으로부터 자유한 것이 (신)복음주의의 업적이다. 원래의 복음주의의 문제점은 지성적 빈곤이다. 복음주의는 지성적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무식하고 열심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특징이다.

한국교회는 비판적 분석이나 진지한 성찰보다는 문제를 단순화하였다. 회개하라, 기도하라 등등… 삶과 신앙이 그리 간단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오지의 미개인들은 숫자가 하나, 둘, 셋, 많다…) 문제의 해결책을 영감과 은사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은 생각하게 하시고 연습(훈련)하게 하시고 고민하게 하신다.

오순절주의는 복음주의의 생존전략이다.(자기(복음주의)의 생존을 지키려는 몸부림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분파주의로 간다.) 복음주의는 기독교의 신앙의 본질적 요소를 보존하였으나 반지성적 경향으로 대중적 차원에서는 큰 성과를 얻었으나 지성계, 문화계, 지식층에서는 큰 힘을 가지게 되지 못하였다. 우리는 어떻게 복음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 문제점을 극복해야 하는가?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이다.

복음주의는 그 영향력은 확대되나 위기에 처해 있다. (영적 가난) 업적으로 자랑한다는 것은 속이 비어 있다는 반증이다. 열정과 헌신은 있으나 충만하고 만족하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적다는 이야기이다. 구원과 회심에 감격할 뿐, 더 깊은 부분에서는 영혼의 빈곤에 처해있다. 우리는 일만 해서 안 되는 존재이다. 영혼과 인격을 채우는 기독교 신앙의 총체적, 실존과 인생과 세계와 역사를 담아내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복음주의 위기는,
1. 정체성의 위기이다. 부흥운동은 정체성이 흐려진다. 부흥운동은 개인적 감격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전체를 설명하는 신학이 부재하게 된다. 한국교회는 균형이 없다. 즉, 종합으로써 신학이 없다. 자기가 선 곳이 원점이고 기준이 되었다. 체험과 정서에 강조함으로 신학과 신앙의 핵심이 흐려졌다. (신학교에서 특강하는 큰 교회 담임목사(소위 성공한 목사)는 신학이 필요 없다고 신학생들에게 공공연하게 말한다-문제의 핵심을 보여주는 말이다.)

종교개혁의 형식적 원리는 오직 성경이며, 내용적 원리는 오직 신앙이지만 현대의 복음주의는 이 둘에서 멀어져 주관주의로 떨어졌다. 이제는 내 경험, 내 확인, 내 감동, 내 정서만 남았다. 복음주의는 종교개혁, 청교도운동, 부흥운동, 경건운동 등에 뿌리를 두면서 복음주의는 신앙을 제대로 실천하려는 영적 갱신운동이며 교회를 개혁하려는 운동이다. 갱신은 도덕성에 근거한 갱신이 아니라 신학을 말하는 것이며 기독교의 정체성을 가르치고 실천하고 누리는 것이다.

오늘날 복음주의 운동은 대중성과 실용성에 의해 복음주의는 큰 위기에 처해있다. 군중이 원하는 대로 하기 시작했다. 수적 부흥과 더 많은 헌금 때문에.. 복음의 진정한 진리와 타협하게 되었다.

2. 반지성주의이다. 경견주의(기독교 신앙이 논리가 아니라 실천을 재발견), 부흥운동의 영향이다. 체험에 주관점을 둠으로써 문제가 발생(체험은 말씀을 통해 확인해야 한다.) 경건을 지성에 대한 관심을 포함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내적 상태로 정의하였다. (위치만 리 쪽의 문제점을 설명할 수 있다. 모이면 내적 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강조한다.) 영적 체험은 귀하고 중요한 것이지만(격려, 확인, 위로하심),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이에게 그렇게 하시지 않음을 기독교역사가 말해 주고 있다.

부흥운동에서도 이러한 부작용이 일어났다. 행동적, 즉각적, 개인적인 특징을 가졌다. 감동이 있는 설교자에 의한 즉각적인 반응과 결과라는 주된 방법과 통로로 생각했다. 간접적 지식이나 기독교 사상을 활용하지 않았다. 지성의 생명력을 손상시켰다. 지성의 발전에 저해하였다. 책을 보아도 간증서가 대부분이다. 결국 그 내용은 ‘나는 이렇게 주님을 만났고 이제 행복합니다’ 라는 이야기이다. 동화책 수준임을 알아야 한다.

비판적 분석과 진지한 성찰이 없다. 지적 도구를 포기했다. 사람은 지성적인 동물이다. 물론 감정도 있지만….. (방언은 통역할 수 없으면 하지 말라..)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생각하는 것이 신앙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생각해야 한다. 자연과 초월의 영역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임을 알아야 한다. 복음주의는 체험을 강조하여 교리와 신학에 무관심하게 되었다.

오늘날 복음주의의 부작용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것이 교파간의 차이가 없어졌다는 데에 있다. 정체성이 없어져서 울타리가 없어졌다. 대부분 순복음 교회이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복음주의의 특징과 본질과의 혼돈이다. 복음주의 특징인 행동주의, 회심을 기독교의 본질적 요소로 여기기 시작하였다.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가 아닌 ‘예수님을 믿습니까?’이다. 더 이상 묻는 것은 월권이다. 복음주의는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고 주장한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기독교의 신앙의 본질을 가르치고 보존하고 누리는 곳으로써의 교회이다. 어떤 일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가장 큰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그리스도와 연합된 하나님의 자녀라는 본질이다. 구원과 영원한 승리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이러한 것을 공동체에서 나누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깊은 감사와 헌신이 중요하다.

3. 분파주의이다. 다극화, 인종적, 계층적 경향을 강화하는 이데올로기적 운동이 되었다. 자신의 특정 관심사를 증진시키는 교회내 파당의 기능을 한다. 특징이 본질을 대신하기 때문에 이러한 운동을 하지 않으면 간첩이 된다. 열심적인 운동.. 예를 들면 ‘선교와 북한돕기’이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교회가 아니다라고 한다. 교회의 표지는 말씀선포, 성찬시행, 권징의 시행이다. 특징으로 ‘다양성’이 아닌 본질로써 ‘다르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현 교회의 모습들을 비관적으로 제시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까지 왔음을 알아야 함을 말한다. 우리는 온전함을 향해 더 가야 함을 말한다. 남은 것은 청,장년의 숙제이다. 나는(박영선목사) 여기까지 하고 죽으면 된다.

6강-복음주의에 대한 기독교적 해결책 : 엡1:7~10

한국교회의 신앙의 풍토는 복음주의이다. 신학적 뿌리는 종교개혁에 삼고 있고 신앙의 내용은 청교도운동, 경건주의, 부흥운동 전통에 그 뿌리를 둔다. 특징은 회심, 체험, 신앙실천의 열정이다. 종종, 특징이 본질을 대신하는 부작용을 낳는다. 부작용은 한국교회의 현실과 신앙의 내용으로 확인할 수 있다 가장 큰 부작용은 신학이 실종된 것이다 신학의 실종이란 우리가 믿는 내용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소유하는 종합적이고 총체적인 이해가 없다. 본인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을 치중한다.
한 사람의 신앙을 점검할 때도 신학적이기보다 열심이나 뜨거움 등으로 판단한다. 복음주의 특징은 믿음의 초점이 하나님으로부터 개인으로, 주관주의적으로 되었다. 심미주의적 설교가 대중을 이루게 되었다. 실용주의적인 강조들이 난무하고 문화에 대한 명쾌한 분석이나 생각하는 풍토가 없어졌다. 단순하게, 원색적이 되었다. 질서, 조화, 종합적인 것이 홀대 받는다. 예를 들면 신학생들이 신학교에서 신학 때문에 신앙을 잃는다고 한다. 이것이 복음주의가 가지는 본질을 잘 표현한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나의 관심사만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공부해야 한다.

신앙의 총체적인 내용을 알아야 한다. 신학의 3요소는 1.신앙고백적 요소. 2.성찰, 3.미덕의 개발(=영성)이다.
1은 교회가 믿는 내용으로 교리에 농축되어 있다. 권위적인 진리로써(사람의 합의가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 기독교 생활과 실천의 중심이다. 이 지식이 없으면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정의하는 것이 빠지게 된다. 믿음과 예배와 선포, 봉사의 수단 등을 잃게 된다.
2는 권위적인 말씀들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인정하는 지적 싸움을 내포한다. 하나님의 성품, 행위, 의지 등을 명료하게 드러내는 작업이다. 현재를 절대화하지 않고 역사 전체를 통해 검증하는 반성적 성찰이다.

3은 삶의 지혜, 영성으로써 현실에 기독교의 실천을 담아내는 지혜와 실력을 말한다. 회사에 가면 주를 섬기듯이 일을 하는 것을 말한다. 신우회를 만드는 것만이 아니다. 생각과 실천이 연합하는 것을 말한다. 고백과 소원들을 실천할 때 그 실천이 생각을 담아내야 한다. 한국교회가 두고두고 연구하고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다. 비판이나 부정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는 의미에서 말한다. 우리의 신앙은 근래까지 ‘예수 천당’이었다. 순교에 대한 견해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순교로써 신앙을 증명할 수 밖에 없는가? 다른 것은 없는 것인가? 요즘은 전도로 신앙을, 진심을 표현하는 방법밖에 없다. 우리는 다른 종합적인 방법이 없다는 이야기 이다. 아직 어리다는 이야기이다.

기독교적인 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원색적인, 감동의 싸움이 아니라 넓게, 깊게, 크게, 두텁게 예수 믿는다는 것으로 채우고 충만게 하고 부요케하는 싸움이다. 신앙고백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이제는 초월이라는 것을 거부하고 합리적으로 되어 학문세계에서 신앙고백이 거부되었다.

계몽주의로 시작된 합리주의에 함몰되었다. 현대화로 인한 세속성, 다원주의들 때문에 신앙고백이 없어졌다. 신앙고백이 사라지면, 신학적 성찰의 내용과 주제가 없어져서 새로운 주제를 찾게 되었고 동양적 영성에서부터 급진 정치학에 이르기까지, 페미니스트 이데올로기에서 환경까지 모든 부분이 신학적 성찰을 하게 되었다. 신앙고백이 사라지자 기독교는 성찰할 내용을 만들게 되었고 그것은 사회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삶의 전 영역을 담아낼 신학이나 신앙이 조그만한 주제에 국한되기 시작되었다.

예를 들면, 노동문제도 중요하지만 기독교 신앙고백의, 신학의 본질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심리 치료가 넘치게 되었다. 자아에 대한 해결이 주된 것이 되었다. 각자의 신앙고백이 있을 뿐이다. 전체가 동의하고 하나되게 하는 신앙고백이 없다. 오늘날 목회자들은 현대성이 낳은 경영자와 심리학자 유형의 목회자가 되었다.
우리들은 신앙의 실천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정의해야 한다. 현대적 지혜가 신앙고백을 대신하였다. 학문의 세계에서는 성찰에 대한 신학의 의미가 축소되었고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실천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 없다. 고백한 내용으로서의 성찰이 아닌 각자 자기가 믿고 있는 것에 대한 성찰만 있을 뿐이다.

기독교는 고백에서 실천에 이르는 과정까지 어떤 모습과 방법, 본질을 드러내는가에 있다.
성찰은 고백에서 무너졌고, 이로써 신학적 성찰이 필요 없는 주제를 찾아 나서게 되었고 이로 인해 영성이 없어진 것이다. 선교사수나 선교헌금 등으로 교회를 평가할 수 밖에 없는 세계가 되었다. 자기확인을 이런 식으로 하고 있는 서글픈 현실이다.

교회의 보이는 것들로 확인한다. 복음주의는 신학성찰의 현학성을 지적하고 즉, 이론화, 관념화, 실천의 부재를 지적했으나 생명의 역동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복음주의가 신학을 상실하자 대중성, 상업성, 실용성을 수용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한국교회는 언제 할렐루야를 외치는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의 소원이나 문제해결에 ‘할렐루야’라고 말한다.

해방신학적인 복음주의, 은사주의적인 복음주의 등이 되었다. 본질은 사라지고 수식어로 표현하게 되었다. 영혼의 깊은 만족이 없어진다. 신앙고백이 빠지면 교회는 교회일 수 없고 성도는 성도일 수 없다. 하나님과 자아에 대한 견해가 서로 바뀌었다.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는 더 큰 종이 되었다. 믿음은 믿음의 대상에 대한 것이고 적극적 사고방식은 자기에 대한 것이다. ‘할 수 있거든’을 자기에게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지만(예;왜 그렇게 있느냐? 기도하면 된다) 실제로 ‘할 수 있거든’은 하나님께 대한 것이다.

통성기도를 보면 ‘(하나님께서) 들어시라’는 기도가 아니라 아우성을 쳐서 정상적인 사고체계를 못하게 하여 자신이 할 수 있도록 믿고 돌아가게 하는 자기최면일 뿐이다.(통성기도를 제발 삼가하자. 통성기도는 절체절명 때 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종교가 아니라 믿는 자의 종교가 되었다. 죄, 은혜 등이 성경적인 의미와 다르게 사용하게 되었다. 죄란 하나님과의 분리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서의 죄의 개념은 자기를 과소평가하는 것이나 자기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신학의 실종은 한국교회가 전체가 짚고 넘어갈 부분이다. 정체성의 위기임을 알아야 한다. 복음주의는 영적 실천과 신학적 내용을 충실히 지키려는 운동 이였으나 본질을 특징과 혼동해 버렸다. 본질이란 복음의 내용이다. 복음의 내용이란 논리나 체험보다 우선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을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은 누구신가?’와 우리의 현실을 담고 있다. 우리가 한 경험은 신학의 전체 내용 중에 한 부분이다. 경험을 통해 경험하지 않은 내용을 소유하는 신학적 성찰을 가져야 한다. (무식할 때 힘을 가지면 굉장히 위험하다. 무식할 때는 무능해야 한다.) 특징을 본질화할 때 분파주의가 된다.

교회란 기독교 신앙을 담은 공동체의 정수이다. 교회의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활동은 예배(경배와 찬양)이다.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으로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이러한 근본적인 활동(즉, 예배)을 통해 다른 활동이 나아오게 된다.(전도,봉사,등….)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함에 따른 만족이 있어야 하나 우리는 활동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있다.

지금은 통성기도 할 때(교회의 절체 절명의 시기)라기 보다는 생각하고 지평을 넓힐 때이다.
기독교를 설명하기 위해 초월을 부르는 오류를 범하지 말라. 즉, 사소한 일에 하나님께서 불을 내려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성령충만을 초월적인 것으로 묘사되지 않고(엡5) ‘생각하라, 분별하라, 깨어있으라, 연습하라’의 반복으로 성령충만을 묘사하고 있다. 술 취하면 자신의 분별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대비(술-성령)시킨 것이다. 자신의 주관적 감격과 체험에 머무르지 말라. 자신의 삶의 변화로써 자신의 신앙을 증거해야 한다. 명분과 열정만 있지 실제로 달라진 것이 없다. 한국교회는 초등학교 4학년 수준임을 알아야 한다. (비관적, 비난적인 의미가 아니라 우리의 수준을 올바르게 알자는 의미이다.)

한국교회 복음주의의 최대의 특징은 회심이다. 열심은 귀한 것이지만 신학 전체를 보면 일부분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 ‘삶과 성품의 변화'(하나님의 영광의 회복)라는 구속의 더 큰 부분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내 좌익이든 우익이든 일상의 구속이라는 일관성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삶 속에서 스승으로써 예수가 존재하지 않는다. 구원에 대해서만 예수를 말하지만 삶 속에서의 예수를 말하지 않는다. 죄 관리만 있지 일과 직업, 사회에서의 예수의 초청은 무시되고 외면되고 있다. 말과 삶으로 세상에 우리의 신앙을 제시해야 한다. 세상은 오직 기능만 요구한다. 교회 내에서도 기능만을 요구한다. 즉, 효율성만을 따진다. 세상처럼…. 신앙을 능력으로 본다. 그러나 신앙은 순종과 인내를 앞세운다.

자유주의는 역사 속에 뿌리를 박은(예수님의 성육신과 죽음, 부활) 기독교를 부인하였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서의 구원이다. 우리는 우리의 육신, 인생, 존재를 바쳐 새사람으로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 구원을 내세적이고 종말적으로만 정의되어서는 안된다. 구원은 하나님과의 화목과 연합이다. 그리고 또한 이웃과의 화목이고 연합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 나라(천국)에 사는 원리와 자세로 이 세상에 살아야 한다. 비록 이 세상에서 고통과 슬픔이 남아있지만 하나님의 통치를 보여주어야 한다.

특징과 관심사로 서로 배척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람이 어떻게 다른가를 증언해 낼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선조들은 순교와 피로 지켜 왔고 집 팔아 교회건축 했지만(그런 신앙을 인정하고) 이제 우리는 기독교의 진리를 지키고 영성을 지켜야 한다.

출처: 창원 늘푸른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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